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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

달하 노피곰 돋아샤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창가가 휘영청 밝아서 내다보니 보름달이 떠 있습니다. 정월대보름이 지난지 며칠 됐지만 달은 여전히 밝고, 환합니다. 누군가는 저 달을 보면서 내밀한 자신의 언어로 말하고 있겠지요. 천년 전, 백제의 여인이 저 달을 보면서 소원을 빌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바쁘지만 무의미한 일상 속에서, 잠자리에 누울 때라도 저 달을 볼 수 있어 참으로 다행입니다. 더보기
콜라를 쏟으며 통닭을 주문하니 콜라가 같이 옵니다. 통닭은 먹고 콜라는 싱크대에 쏟습니다. 인스턴트 음식에 탄산음료까지 마시는 게 좀 과하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어릴 적 소풍갈 때, 환타나 사이다 같은 음료수를 사오는 아이들이 부러웠습니다. 소풍이라고 해도, 나는 받은 용돈이 너무 적어 사이다를 살 수가 없었습니다. 어쩌다, 정말 어쩌다가 기회가 돼서 환타 한 잔을 마시게 되는 날에는, 그 날은 왠지 횡재를 한 기분이었습니다. 어린 시절을 통틀어, 그런 날은 손으로 꼽을 정도였지만. 그런데 지금은 몸에 좋지 않다고 버리고 있습니다. 한창 성장할 나이에 먹을 게 없어서 늘 얼굴에 마른버짐이 피어나고, 배가 고팠는데 이제는 먹을 것이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문득, 장 지글러가 쓴 책이 생각납니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 더보기
다시 명절에 내일이 추석입니다. 창 밖으로 보름달이 눈부십니다. 명절에 고향에 가본 지가 십 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자식들이 서울과 인천에 살다보니, 어머니께서 자식들을 찾아오시는 까닭입니다. 생각해 보면, 고등학생 이후로 명절이 기다려지거나 즐거웠던 기억이 없습니다. 사는 게 고달프다 보니, 명절이 없었으면, 어서 지나갔으면, 이런 생각만 하게 된 것 같습니다. 명절, 누군가에게는 즐겁고 설레는 날이겠지만, 내게는 어린 시절 빼고는 쓸쓸함 뿐입니다. 어린시절, 명절을 손꼽아 기다리던 때가 그립습니다. 오래 전에 이미 남의 집이 된, 고향집 토방에서 저토록 밝은 달을 보고싶습니다. 더보기
아름다운 청년 며칠 전, 늦은 휴가를 떠나려고 보니 자동차 뒷바퀴가 시원찮았습니다. 왠지 바람이 좀 없다 싶어서, 전철역 근처의 카센터에 갔더니 펑크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카센터는 바빠서 수리할 수 없으니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하더군요. 뭐, 그럴 수도 있지요. 돈 안 되는 펑크 수리보다 급한 손님들이 있을 테니까요. 조금 섭섭했지만, 이해하려고 하면서 다른 카센터를 찾았습니다. 다행히 머지 않은 곳에 있는 카센터와 세차장을 겸하는 곳을 찾았습니다. 그곳에서 이십대 초반의 청년을 만났습니다. 청년은 뒷바퀴에 박힌 어른 손가락 길이의 큰 못을 뽑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친절하게 설명하며 잘 수리해 주었습니다. 더운 날에, 선한 얼굴로 웃으면서 대해주는 청년에게서 나는 고마움과 기쁨을 선물받았습니다. 나는 살아오면서 .. 더보기
어머니 여름 휴가철이라서 버스를 타고 어머니 계시는 고향에 다녀왔습니다. 이 염천에, 어머니는 선풍기도 꺼내놓지 않으셨더군요. 어머니, 이렇게 더운데 왜 선풍기를 안 쓰세요? 덥긴 뭐가 덥냐. 찬물로 씻고 나면 하나도 안 덥다. 전깃세는 흙 파서 내냐. 나는 괜찮다. 어머니. 제발 곰팡난 쌀좀 버리세요. 남들도 다 먹는데 아깝게 왜 버린다냐. 난 괜찮다. 나는 곰팡난 쌀을 차마 먹을 수가 없어서, 마트에 가서 봉지 쌀을 사다가 밥을 지었습니다. 늦은 밤에 모자가 나란히 밥을 먹습니다. 내가 고집을 부려 선풍기를 강풍으로 돌렸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한들, 어머니 마음이 바뀔 리 있겠습니까. 하도 마음이 편치 않아, 사흘 계획한 고향길을, 허위허위 재촉해서 이튿날 그냥 올라오고 말았습니다. 도시에 와서도 마음이 .. 더보기
여름이 좋은 이유 요즘엔 봄, 가을이 없고 여름과 겨울 뿐이라고들 합니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닙니다. 이른 더위는 유월부터 시작되었고, 바야흐로 장마철입니다. 봄, 오월을 좋아하지만, 봄과 가을을 좋아하지만, 그래도 겨울보다는 여름이 좋습니다. 여름. 무더위, 더위와 땀과 끈끈함.. 그래도 여름이 좋습니다. 뜨거운 태양과, 지상의 후끈한 열기. 짙푸른 나무와 숲. 파란 하늘. 숨막히게 더운 날이지만, 힘이 빠지고 축 늘어질 정도로 덥지만, 그래도 이 열정의 계절이 좋습니다. 여름이 좋은 또 한 가지 이유. 가난한 사람들이 살기에는 겨울보다는 덜 혹독하기 때문입니다. 겨울 추위에는 밖에 나갈 수도 없고, 안에 있어도 가난한 사람은 난방을 할 수 없지만, 여름에는 나무 그늘에 있으면 그런대로 견딜만하기 때문입니다. 여름에 태.. 더보기
그리움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에 갔습니다. 아내는 고향이 그리웠을 겁니다. 내가 바닷가 고향을 늘 그리워하듯 말입니다. 아내는 산골에서 태어났고, 나는 바닷가에서 태어났습니다. 아이들과 아내가 없는 텅 빈 집은 왠지 쓸쓸하여, 끼니도 거르고 대충대충 지냅니다. 아내와, 개구쟁이 아들과, 귀여운 딸아이를 그려봅니다. 연애의 열정과는 빛깔이 약간 다른, 그리움이 밀려옵니다. 내 삶이, 이들과 끈끈하게 맺어져 있음을 새삼 실감합니다. 아내와 아이들을 만나게 될, 남은 일 주일이 아득히 멀게 느껴집니다. 그리움은, 한 순간조차 아득함으로 만드는 묘한 힘이 있습니다. 더보기
전쟁과 평화 일본인 요코이 쇼이치(1915~1997)는 1944년 태평양 전쟁 때 육군 병장으로 괌에 파병되었습니다. 일본군이 패망하자 요코이 쇼이치는 괌의 정글 속에서 28년간이나 숨어 지내다가, 57세가 되던 1972년 괌의 원주민에게 발견되어 일본으로 돌아왔습니다. 무려 28년 동안 정글에서 혼자 살다가 일본으로 돌아온 요코이 쇼이치. 그는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쟁은 인간이 결코 할 짓이 아니라고... 평화가 좋은 것이라고. 더보기
미용실에서 미용실에 가는 것은 기분 좋은 일입니다. 일단은, 어수선한 머리를 정돈할 수 있으니 좋고요, 가만히 의자에 앉아 있으면 알아서 머리를 손질해 주니 좋지요. 설날을 하루 앞두고 미용실에 갔습니다. 사는 게 바쁘다 보니, 미용실 갈 시간도 없었나 봅니다. 저는 미용실에 가면 의자에 앉아서 졸 때가 많습니다. 그 졸음을 저는 좋아합니다. 마음의 평화 같은 것. 어제도 졸다가 깨서, 하얀 천 위의 머리카락을 보다가, 예전에 비해 머리카락 속에 흰 머리카락이 드문드문 눈에 띄는 것을 알았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흰머리가 좀 있었어도 미용실에서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문득, 서글픔이 밀려옵니다. 아, 벌써 세월이 이렇게 흘렀구나. 꾸벅꾸벅 졸면서 느끼던 마음의 평화는 저만치 가고, 여러 가지 복.. 더보기
면봉 상처가 생겨서 연고와 면봉을 샀습니다. 약국에서 준 면봉은 플라스틱 상자에 들어있어 제법 고급스러워 보였습니다. 작은 상자에 가득한 면봉은 아무리 써도 줄어들지 않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나는 화수분을 보듯 목화솜 같은 면봉을 신기하게 바라보았습니다. 내가 쓰기 위해서 면봉을 산 것은 이번이 처음인지라, 나는 연고를 바르다가 떨어뜨리기도 하고, 한두 번 대충 바르고 면봉을 버립니다. 면봉은 셀 수 없이 많아 보였으므로. 세월은, 상처를 아물게 합니다. 상처를 봉합한 지 닷새 뒤에 실밥을 뽑고, 2주 뒤에는 상처가 완전히 아물었습니다. 그 사이, 그렇게 많아 보이던 면봉은, 어느새 두 개만 덩그러니 남았습니다. 그제서야 나는 플라스틱 상자에 씌인 면봉의 개수를 보았습니다. 100개. 다시 보니, 겨우 두 개.. 더보기